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KBS 1TV (문단 편집) === [[언론통폐합]]과 컬러화 === 1980년 11월 12일, [[5.18 민주화운동|광주민주화 운동]]과 서울의 봄을 유혈진압한 [[대한민국 제5공화국|전두환 정권]]이 보다 효과적인 [[언론통제]]를 위해 전면적으로 언론통폐합을 단행했다.[* 물론 겉으로는 사이비 기자 퇴치, 방송공영화를 내세웠다.] 이로 인해 방송과 신문의 겸영 및 주재기자제가 금지되고 지방지는 1도 1지로, 5개사로 난립되었던 통신사는 단일 통신사 '[[연합통신]]'으로 개편되었으며, 거기에 [[기독교방송|CBS]]의 보도기능과 광고방송(상업광고방송)이 폐지되었고, [[동양방송|TBC]], [[동아방송|DBS]]가 KBS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KBS는 TV 채널 2개[* [[KBS 3TV]]와 [[EBS FM|KBS 교육FM]]은 1981년 2월 2일에 개국했다.], 라디오 채널 7개를 가져 초 거대 방송사로 등극하였고, 기존 KBS-TV는 12월 1일부로 '''KBS 1TV'''로 명칭을 변경했다. 이와 동시에 수출의 날 기념식 중계방송을 컬러로 중계함으로써 세계에서 81번째로 컬러방송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컬러방송 시행이 늦어진 건 1970년대 초반부터 컬러방송 시행논의가 있었지만 이에 박정희가 "계층간 위화감을 조성한다"면서 반대해서라는 후문이 있다. 하지만 [[KBS1]]를 비롯한 대부분의 TV 방송국들은 컬러방송 준비가 이미 완료되어 있었고, 컬러필름으로 녹화한 1970년대 프로그램들이 꽤 남아있다.] 이후 1980년 12월 9일, 컬러화비용과 TBC, DBS를 인수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상업광고 재개를 허용받고, 동시에 [[시청료]] 인상을 추진하였는데, 흑백 TV 시청료 인상에는 실패했지만, 대신 각종 로비로 컬러 TV 시청료를 월 2,500원으로 정하는데 성공[* 동시기 해외 TV시청료를 본다면 [[영국]]은 월 2.83파운드(당시 한화로 4,300원), [[일본]]은 월 880엔(2,830원)선이고 [[뉴질랜드]]는 월 2,300원 선이었다.]하고 동시에 1981년 3월 7일에 광고를 다시 하면서 재정을 충당하게 되었다. 1982년 1월에 재정충당을 위해 [[KBS 2TV]]의 광고시간을 확대하면서 공영성 강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1TV의 광고시간이 축소[* 1일 3블록→ 평일 1블럭, 주말 3블럭.]되었다가 당년 4월에 평일 오전시간대에 블록광고를 편성하게 되어 광고 시간이 늘어났다.[* 평일 1블럭→ 2블럭, 주말 3블럭→ 4블럭.] 윤재걸 기자가 <신동아> 1986년 5월호에 낸 [[https://snumemory.org/items/show/193|칼럼]] 등을 토대로 하자면, 당시엔 친정부/친자본성 [[땡전뉴스|편파방송]]으로 시청료도 아까워 죽겠는데 광고도 같이 늘어났으니 시청자들이 KBS를 곱게 보지만은 않았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한국 애니메이션|국산 애니메이션]]을 거의 명절에나 편성해주던 상황이었으며, 그것도 영화 재방으로 TV용은 결코 아니었다. 학생운동이나 공안사건이 터지면 '보도특집'을 긴급 편성해 민주화 운동 자체를 '좌경 공산폭동'으로 매도하는가 하면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들의 비참한 실상을 감추고 허구적 성공사례만 내보냈다. [[3S정책|심지어 국민들의 정치적 관심을 희석시키고 광고 수입을 더 벌기 위해 편성표의 반 이상을 스포츠에 할애하고 광고 역시 명색이 공영방송인데 나레이터의 육감적인 목소리로 낸 "돌려 먹을래"나 "빨아 먹을래" 같은 선정적 멘트까지 거르지 않았다.]] 이에 시청자가 시청료 납부를 거부하면 [[삼정의 문란|징수원들이 집까지 들이닥쳐 '빨갱이'라 부르며 폭언, 공갈, 협박, 폭행까지 감행했다.]]([[https://archives.kdemo.or.kr/isad/view/00840724|당시 항의문]]) 이게 곪아 터진게 1985년 시청료 납부 거부운동[* 사실 TV 시청료 징수 거부운동이 시작된건 1982년부터지만, 당시 여러가지 한계점들로 인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이었는데, [[1985년]] 총선과정에서 KBS는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을 노골적으로 치켜세우고 야당인 [[신한민주당|신민당]]을 대놓고 비하하자 시청료 거부운동이 본격적으로 확산하기 시작하며 1985년부터 시청료 수입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이에 KBS는 [[1985년]] 5월에 술 광고를 폐지하고, SA시간대(20:00~22:30)의 광고를 줄였다.[* 기존에 1블록당 10개씩 묶어 편성되었던 걸 1블록당 8개로 줄였다.] 하지만 정작 가장 문제가 되었던 편파보도가 개선되지 않으면서 시청료 거부운동이 확산일로를 걷게 되고, 거기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등 민주 시민사회단체까지 나서서 KBS 시청거부 운동까지 벌이자 1986년 7월에 평일 오후 블록광고(20:30~20:35)를 폐지하였다. 물론 당연히 미봉책에 불과했고 정부는 KBS에 강제징수권을 부여하며 1986년 대도시에 통합공과금 제도[* 제도 자체는 1983년부터 시범적으로 시도했다.]를 점차 도입하고 경찰과 보도지침까지 동원하며 이를 막으려 했다. 이후에도 KBS 시청료 징수율은 [[1988년]]까지 계속 하락세를 이어갔다. 한 편 이 시기 편성 가운데서 두드러진 점이 있었는데 스포츠 중계방송의 비중이 높았다는 것, 특히 주말 낮 시간대를 거의 스포츠 중계방송으로 때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는 당시 [[MBC]]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MBC의 경우, [[MBC 청룡]]이라는 야구팀을 소유했었다는 점이 가장 컸다.] 이는 5공의 스포츠 장려정책[* 이른바 [[1986 서울 아시안 게임|1986년 아시안게임]] - [[1988 서울 올림픽|1988년 올림픽]] 유치.]도 있었지만 [[KBS2|2TV]]와 다르게 1TV에서는 정규 프로그램에 따로 광고를 붙일 수는 없었고 프로그램 사이에 방영하는 블록광고도 일정 횟수[* 1982년부터 1986년까지 4회, 그 이후에는 3회다.]이상 편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포츠 중계방송의 편성이 훨씬 이득이었던지라 당연히 [[KBS1|1TV]]의 스포츠 중계방송의 비중이 높아졌던 것이다. 이는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져 내려왔고, 현재까지도 그 영향이 상당히 남아있어서 현재도 KBS 1TV에서 스포츠 중계 프로그램[* K리그, 씨름, 겨울의 V-리그, 프로농구 및 종목별 국가대표 선발전.]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물론 광고를 붙일 수는 없으니 월드컵, 올림픽. WBC나 축구국대전의 경우 2TV에서 편성하는 경우가 많다. (단, 경기시간이 겹치는 월드컵이나 올림픽 축구 조별리그 3차전은 2TV가 한 경기([[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대한민국]] 경기 포함)를 중계하면 다른 경기는 1TV에서 중계한다.) 또 KBO 리그는 광고 수익이 상당하기 때문에 1998년 이후에는 포스트 시즌 경기를 2TV로 넘기고 2000년대 후반부터 거의 [[KBS2|2TV]]에서 중계하고 있는 상황이다.][* 축구국대전은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아시아 예선 경기까지 KBS 1TV에서 담당하다 IMF 외환위기 이후 본선 경기부터는 광고 수익이 상당하다고 판단했는지 KBS 2TV에서 중계하기 시작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4383458?sid=103|#]]] 그리고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때 개막식과 폐막식은 주로 KBS 1TV를 통해 중계되어 타 방송과 다르게 광고없이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개막식, 폐막식,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개막식, 폐막식, [[2014 인천 아시안게임]] 개막식,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폐막식은 [[KBS2|2TV]]에서 방송되었다.] 민주화 이후 1988년에 올림픽 특집-중계프로그램, 사회고발 프로그램 등을 집중적으로 편성하였으며, [[떠돌이 까치]][* 다만 [[떠돌이 까치]]는 1987년 5월 5일에 방영되었으니 민주화 이전의 일이다.], [[아기공룡 둘리]], 까치의 날개, [[날아라 슈퍼보드]] 등의 국산 애니메이션들이 특집 프로그램으로 편성되었다.[* 다만 [[달려라 하니]], [[천방지축 하니]], [[영심이(애니메이션)|영심이]], [[옛날 옛적에(애니메이션)|옛날 옛적에]], [[2020 우주의 원더키디]]와 같은 시리즈물은 [[KBS2|2TV]]에서 첫 방송했다. (다만 아기공룡 둘리의 경우 첫 방영은 6~7개의 에피소드를 여러 개 묶어서 방영하였다. 그래서 1TV에서 방영했던 것이다.)] 이후 1989년 3월 봄개편 들어, KBS는 1TV를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022800329212002&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9-02-28&officeId=00032&pageNo=12&printNo=13362&publishType=00020|보도,교양 프로그램을 대폭 강화하면서]] 지금과 비슷한 편성 패턴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1990년 3월 평일 블록광고를 폐지했다. 하지만 1TV 광고수입은 오히려 급증했는데, 1TV에 스포츠 중계, 특집 프로그램을 대량 편성해서 이전보다 광고수익은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0092600289111005&editNo=4&printCount=1&publishDate=1990-09-26&officeId=00028&pageNo=11&printNo=733&publishType=00010|증가]]했다.[* 다만 1991년부터 1993년까지는 광고수입이 감소세에 접어들기도 했다.] [[SBS]]의 개국 이후 한 동안 오락 프로그램의 비중이 늘어났다가 1992년 가을개편과 1993년 봄개편 들어 다시 보도 프로그램, 오락 프로그램의 비중이 높아져 갔다. [[1990년대]] 초반까지는 아나운서가 나와서 방송순서를 안내하는 유럽식 방식을 쓴적도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